[단비] '책'(冊)과 죄'책'(罪責)


   독서를 취미로 여기는 사람도 책을 읽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가 왕왕 있다. 다소 건방지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말이다. 친구들에게 그런 고민을 털어놓고 재수 없다는 소리를 수차례 들어 보았다. 보통 독서를 한다고 하면 고급지고 생산적인 활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서 죄책감을 느낀단 말인가?


  사실 학부 졸업 직전 한 교수님과 면담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대화의 핵심은 이거였다. ‘졸업하고 뭐 할래?’ 나는 국제통상학과를 다녔지만 무역이니 경제니 하는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 교수님의 입장에서 느끼기엔 다소 난데없는 대답을 내놓았던 모양이다. ‘출판사나 영화 잡지사면 좋을 것 같고, 아니면 영어영문학과로 대학원에 들어가고 싶어요.’ ‘영문학과 대학원?!’ 나는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교수님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제부터 있을 대화에서 대학원이라는 선택지는 지우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럼 취업을 위해 면접을 본다고 했을 때 그 기업이 단비씨를 뽑아야 하는 이유를 어필해 봐요.’ 학과가 안 맞아 방황하고 있다는 핑계로 학부 생활이며 스펙쌓기에 소홀했던 나는 딱히 할 말이 없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책을 좋아하고……많이 읽었습니다.’ 교수님은 얼이 빠졌다. 열없이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아직 이것저것 탐색해 보고 있는 중입니다, 하고 대충 얼버무리며 면담을 끝내기를 바랐으나 교수님은 한마디 더 얹으셨다. ‘책 읽는 거 그냥 게임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나는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내가 여태까지 뭘 한 거지?’ 그 질문은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세상은 왜 사람은 독서를 해야 한다고 했나,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던데 그런 멋있는 말들은 진짜일까? 하는 것들이었고 그 질문들은 정신없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내 눈물샘에 어퍼컷을 날린 단 하나의 의문은 ‘나는 왜 책을 읽나?’ 하는 것이었다. 현실도피를 위해서, 혹은 놀지는 않고 있다는 알량한 자기위로로? 사실 이건 모두 합리화의 연속이었던 건가.


  친구들은 그런 헛소리에 얽매이지 말고 대충 넘겨들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정말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소위 말하는 경제적이고 생산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교수님의 그 말은 내 머리를 후려친 둔기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독서는 ‘게임처럼’ 시간 버리는, 다른 활동에 비해 그 중요성이 현격하게 떨어지는 행위로 전락해버린 것 같다.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는 데 여념이 없어서, 살기 바빠서. 먹고 사는 게 중요한 이 시기에 독서 따위는 사치. 한마디로 정리를 해보자면 ‘생존’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세파에 치이다 보면 현대의 삶 속에서 독서를 한다는 것은 품이 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신없이 일과에 시달리다가 쉴 시간엔 쉬어야 하는데, 그 사이에 책을 읽는다는 건 퍽 어렵다. 내용과 전개방식, 단어들을 꼭꼭 씹어야 하고, 이 일에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막상 책을 덮고 났을 때 뿌듯함 말고는 당장 내 삶에 도움이 되는, 가시적인 성과가 달성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읽고 나면 말이 어려워서, 난해해서, 내용이 우울해서 찝찝함을 남기는 책들도 더러 있다. 그러니 사람들은 말한다. 소설책 한 권 읽을 시간에 토익 토플을 공부하고 면접 준비를 했어야지. 앞선 교수님의 그 말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책에서는 이 사회가 이렇고 저래서 불의하며 부정의하다고만 이야기하지 않는가? 한 번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회의감과 함께 뭉쳐져 있던 죄책감이 물풍선을 바늘로 찌른 것처럼 콸콸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고급진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우쭐대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데 책을 읽는 목적을 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부터 시작해서 현명한 사람이 쓰는 책을 읽었다고 나까지 현명해지는 건 아니다, 하는 한탄까지.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랬다. 책을 읽고 덮고 곱씹으며 여운에 젖어 많은 생각을 했지만, 또 생각이라는 것을 하면서 나름대로 희열을 느꼈지만, 우리는 그래서 무엇을 실천했는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올랐고 이 세상은 조금 더 정의에 대해 사색하는 사회가 되었나?

 책이 내게 보여준 건 새로운 세상, 우리가 실제로 겪어보지 못했던 세상, 우리가 모르고 지났던 세상이었다. 나는 그저 책이 보여주는 세계가 새로우면서도 이상적이라는 사실에 빠져들었다. 현실은 정신없이 흘러가지만 그 속에도 이렇게 정의롭고 지혜로운 사람들, 진흙탕 속에서도 꿈을 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구나, 했다. 희망의 이정표 같은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으면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을 들여다보면 아무도 이상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것은 어떤 삶일까 가끔 상상했다. 그것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왜 나처럼 생각하고 살지 않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에 더 가까웠다. 책이 내 머릿속에 그려놓은 지도에 따르면 한 사회가 흘러가야 할 방향은 이게 아닌데.


   그렇지만 내가 책을 많이 읽고 사고를 단단하게 훈련한다고 해서 세상을 바꿀 능력까지 갖출 수 있는 것도, 책이 내 손에 세상을 흔들 수 있는 훌륭한 무기를 쥐여주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 자랑하며 떠벌릴 지식을 쌓는 정도에 그쳤다.


  요컨대 이런 것이었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나름대로 시각이 넓어지고 다양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늘어나는 것은 자기 기준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사례들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라는 것. 그것은 한 방향으로 동아줄을 꼬는 일과 다르지 않다.

 

  독서를 했으면 남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뭐였더라? 나는 시각의 다양성을 확보했는가? 나는 개방적이고 자유롭고 이상적인 사람이 됐는가? 그러나 막상 돌아보니 나는 내 우직한 기준을 가진 또 하나의 꼰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믿어 의심치 않던 책에 의해서. 어쩌면 나는 ‘독서 이데올로기’에 취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괴감을 앓으면서 책을 펼치지 않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한 티비 프로그램에서 유명인사가 책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듣게 되었다. ‘책을 읽은 사람은 벽을 보지만 좋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벽 너머를 본다.’ 아무리 검색해도 그렇게 말했다는 결과는 뜨지 않는데,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흐르기를 멈춘, 고여 있는 물에 던진 돌덩이였다. 그리고 다시 질문했다. ‘내가 여태까지 뭘 한 거지?’ 그렇다. 나는 아직 높고 두꺼운 현실의 벽의 그림자 아래 있었던 것이다. 벽 너머로는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책이 말하는 바 그대로를 그냥 주는 대로 먹고 있었을 뿐 그 이상의 의미를 찾는다거나 나의 것으로 소화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체할 수밖에. 그러나 책은 세상이 이렇게나 지저분하고 난잡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게끔 하는 것이다. 책이 보여주는 현실을 포착하는 순간도 있고 무기력하게 포섭되어 버리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림자 아래에만 있으면 포착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지도. 우리는 그 현실을 포착하는 사람들이 되어야지 벽의 그림자에 포섭되어 버리는 사람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이 벽이 우둘투둘하다는 것을 알려면 우리는 그것을 유심히 들여봐야 한다. 그곳에 찔려 상처입고 나자빠진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길어올리고 널리 퍼뜨려 서로 연대하는 순간을 만들어야 한다. 벽을 넘어가려면 벽의 높이는 얼마인지, 얼마만큼을 더 올라야 벽 너머로 도달할 수 있을지 알아야 한다.


 어쩌면 반드시 벽을 ‘넘어서야’ 할 이유만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앤디 듀프레인(소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의 락해머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보자. 작은 균열이라도 좋다. 이 균열은 돌파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책은 내 손에 무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선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위치,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벽의 무른 부분을 찾아 개구멍쯤 낼 수도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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