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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단비] 조짐은 늘 있다

최종 수정일: 2022년 2월 18일




지난달에서 이번 달 중순까지는 포장알바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 영향으로 배송사업이 호황이라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말에 단 한 톨의 거짓도 없었음을 깨달은 것은 직접 현장에서 일한 후 그야말로 파김치가 되어 귀가하는 날들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어지고 난 다음이었다. 하루에 10시간 넘게 근무한 적도 꽤 많았고, 인력이 부족하다 하면 주말에도 달려갔다. 근무 시간이 정해져 있는 정식 직원도 아니었거니와 상사도 출근을 강요했던 것은 아니라서(그는 연락할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쉬겠다고 하거나 일을 그만두겠다고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못했다고 해야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이려나? 언제쯤 졸업할 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의 대학원생 신분을 단독으로 유지하기에는 생계가 퍽 위태로웠던 것이 이유다. 마련된지 얼마 안 되어 에어컨조차 설치되지 않은 뜨거운 공장에서 조금 더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던,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어느 날, 텅 빈 머리로 핸드폰을 훑어보다가 쿠팡 이천 물류센터에서 화재가 났다는 기사를 읽었다.


불꽃은 에어컨이 없는 지하 2층, 선풍기를 꽂기 위한 전선 여러 개가 한꺼번에 지나가는 곳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이른 여름이 체감 30도를 웃도는 열기를 품고 있었다. 물류센터가 ‘빠른 배송’, ‘하루만에 배송’에서 이제는 ‘당일 배송’에 ‘새벽배송’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지금, 신속하고 (최대한) 정확하게 상품을 포장하는 일 역시도 배송만큼이나 중요해진, 여름 한가운데의 지금. 더위와 함께 인성도 녹아버려, 함께 일하던 동료에게 종내에는 후회로만 남을 짜증을 버럭 내고 나오던 날 인명 검색을 위해 건물에 진입했던 구조대장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파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겨울에는 한 근로자가 난방이 되지 않던 동탄 물류센터에서 쓰러져 숨진 일이 있었고, 또 그 전 2020년 칠곡 물류센터에서 일하던 20대 청년이 과로로 사망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서울대의 한 청소노동자가 사망했고 뒤이어 고용자들의 갑질논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렇게 머릿속으로라도 한 번 읊고 나니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직접 겪어본 바, 이제는 전혀 남일 같지 않게 느껴져서? 그 전부터 이런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고발은 있어 왔다. 그럼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엄지손가락 하나로 훌훌 내려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힘들긴 해도 돈은 많이 준다는 공장의 조립라인, 돈이 당장 급하면 급하게 찾아서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물류센터, 짧은 기간 동안 빠릿하게 돈 모으고 나면 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는 단기알바. 후기 중에서도 그런 일부의 내용에 주로 눈이 갔던 것 같고, 아 나도 그냥 해볼까? 하고 가볍게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그 모든 내용들은 내가 빠져나오는 것만큼 ‘빠르고 신속하게’ 대체가능한 인력이라는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었고, 돈과 생계가 긴급하지만 스스로를 오롯이 책임져야 하기에 쉽게 어딘가에 의지할 수도 없는 불안정한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 모든 위험과 당연하지 않은 열악함을 감수하고 노동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가 있다는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사실 모르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수준의’ 편리를 제공해준다는 이유로 줄기차게 이용해왔던 서비스의 뒤편에는, 생존을 위해서였으나 외려 ‘그 생존’마저 뒤흔드는 위협을 버티고 선 노동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뿐만이 아니다. 모두들 알고 있다.


그러니까, 조짐은 늘 있다. 그럼에도 비극은 또 일어났다. 인력 경시, 만물의 상품화, 경기 침체, 사회구조의 불안정성…. 그런 종류의 노동이 존재하는 이유도 붙이기 나름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노동’이 있으면 ‘그런 사건’이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그런 노동’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런 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일까?


돌이켜보면 이런 일들은 ‘언제나’ 있어왔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고질적이고 일상적인 문제가 되어버린 셈이다. 하지만 발전이나 개선은 어영부영 더디지 않았나? 그렇기에 별다른 이유를 들고 무슨무슨 사건이라며 이름을 붙이는 일은 머지않아 휘발되어버릴 변명을 주워섬기는 일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린다. 당연하게 여겨져서는 안 되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때 조짐을 눈치챌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일과 사건과 노동을 명명하기 전에 필시 누군가의 이름을 먼저 불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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