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사업의 일환으로 9월 16일 신문연 사무실에서 처음 진행되었던 리서치톡g의 후기라고 해도 좋겠다. 최초의 토커, 최초로 단두대(!)에 오른 사람은 나였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내가 다루고 있는 주제가 문화연구 축에나 속하는지도 잘 모르겠는 데다가 애초에 좋은 소리를 들을 생각으로 참여한 자리도 아니었기에 다소 과격한 표현을 떠올리며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학술계의 해묵은 주제이지만 사회학에서 다루기에는 퍽 낯선 ‘권태’라는 키워드를 고수하고 있는 덕분에 은연중에 소외감을 느낀달까, 이 학계에서 그닥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망상에 빠져 있던 나는, 그래도 어떻게든 석사는 따야지, 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리서치톡g에 토커로 참여하겠다고 덥썩 나서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참여의사는, 홧김에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버스에서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우, 권태라니, 이렇게 재미없을 수가! 하고 걱정과 후회가 섞인 한탄을 내뱉은 것은 경솔했던 내가 가진 일말의 양심이었다.
한적한 사무실에 들어가면 ‘주제가 재미없어 보이죠’ 하고 머쓱하게 운을 떼려 했으나 웬걸, 사무실은 발 디딜 틈이 없이 북적거렸다. 머뭇머뭇 어렵사리 자리를 잡고 앉은 나에게 한 분이 건네신 말씀. ‘주제도 그렇고 글이 너무 재밌어서 친구랑 같이 봤어요.’ 나는 울컥하여 (과장을 좀 섞어) 눈물이 날 뻔한 것을 참으며 두 손을 모은 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했더랬다.
본격적으로 리서치톡이 시작되자 흥미로운 말들이 이곳저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학교에서 지내며, 교수님이나 원우들과 연구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한 번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이었고 받아보지 못했던 눈빛들이었다. 대학원생이라면 으레 ‘무슨 연구하세요?’라는 질문을 들어볼 법하지만 그 이후로는 왠지 대화가 진행이 안 되고, 나름의 실적 압박이나 자신의 연구 주제에 파묻혀 누구도 더 이상은 ‘묻지 않는’ 그런 문화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거침없이 달겨들던 피드백들은 나를 꽤 당황케 했다. 나는 당황하면 머리가 하얘지는데, 하고 걱정했던 것도 잠시, 나는 참여자분들이 건네주시는 말씀에 정신없이 펜머리를 굴려가며 고개를 수십 번 주억거렸고, 이런 저런 피드백을 들으면서 나름대로 디펜스를 펼쳐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권태를 졸업논문 주제로 쓴답시고 무작정 밀고 나가긴 했으나 워낙 자신감이 없었고, 그래서 누구에게 말하거나 글 쓰는 것도 없이 머릿속에서만 진전시키던 내 주제는 조각되기 전의 뭉툭한 돌덩이처럼 세상에 제 모양을 드러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제는 나도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논문 주제 얘기만 나오면 습관처럼 벙어리가 되던 나는 마치 말을 못해 한이 맺힌 귀신이라도 붙은 듯 머릿속에 있던 고민들, 내 나름의 논리를 주절주절 주워섬기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알면서도 미처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들, 이해하고 소화하지 못했던 것들이 다양한 루트를 통해 권태라는 주제와 연결되기 시작했고 나에게 지금 부족한 것, 혹은 너무 과한 것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자 내가 돌덩이를 퉁퉁 쳐내며 조각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 주제가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받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내 연구 경과를 들려주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움츠러들어 있었던 것이다. 밑천을 드러내 보이거나 부족한 면모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리서치톡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과 설왕설래하며 깨달은 것은 나는 어쩌면 사람들에게 ‘제 말 좀 들어보세요’ 하고 외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아니, 이건 분명하다.
스노우 볼링이라고 하던가.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눈덩이를 굴리는 것과 같다. 그냥 내 주제는 이거야, 내 연구는 이런 거야, 라고 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들이 수없이 연결되고 확장되면서 새로운 인사이트가 생성된다. 우리는 ‘그런 것’을 의사소통이라고 부른다.
내 말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와 닿는 것은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수많은 누군가들이 지금도 역시, 아직까지도 ‘아무 말 못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언제든 ‘내 말’을 들어줄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가? 답보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곳에 와서 한 마디라도 더 듣고 한 마디라도 더 꺼내 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다. 자신이 다루는 주제의 분야가 걸린다면 무엇이든 문화가 될 수 있고 문화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여러분,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리서치톡g 진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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