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우리의 눈이 마주친 이유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예고편, 클립에 나온 내용들을 중심으로 작성했기에, 영화 감상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지만,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힙니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난 누굴 보고 있겠어요?”


엘로이즈라는 한 귀족 여인은 결혼을 위해 초상화를 밀라노에 보내야 한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화가를 위해 포즈를 취해 줄 의향이 전혀 없고, 그런 고로 전에 그 저택을 방문했던 다른 화가는 그 일을 그만두기에 이르렀다. 그려지기 위해 고정된 포즈를 취해주는 것이 피사체의 도리이거늘, 엘로이즈는 그것을 답답함을 넘어선 속박으로 여기며 ‘그 본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녀의 어머니는 마리안느라는 화가를 외딴 섬으로 불렀고 엘로이즈의 산책 친구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마리안느에게 주어진 진짜 임무는 산책하는 동안 그녀를 몰래 ‘관찰하여’ 그녀의 초상화를 완성하는 일이다.


최근 영화계 전반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초반부 줄거리다. 이 영화는 ‘마주치는’ 시선에 대한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시선 자체도 대상을 조감하거나 앙양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인물들과 같은 지평을 밟으며 그들에게 조용히 다가가고 그들에게서 조심스럽게 멀어지며, 가만히 바라보거나 이따금은 다소 흔들리는 눈동자를 대변할 뿐이다.


엘로이즈는 어느 순간부터 마리안느가 자신을 바라보면 자신도 마리안느를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이 마주치는 것이다. 누구 하나가 ‘맹목적으로’ 관찰하고 나를 그리라 명령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눈빛으로서 그들은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서로를 포박하는 것이 아니라 껴안는다. 시선을 교환함으로써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의 삶은 서로의 삶 속으로 삼투한다. 그렇게 영화의 주인공들은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서로를 그리는’ 데 쓴다. 머릿속에서 그리고(想), 그림으로 그려낸다(畵). 그런 그들의 대화는 정(靜)적이다. 그러나 정(情)적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제목이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유다. 타오르는-여인의 초상, 타오르는 여인의-초상.

초상화를 그려내는 메커니즘에는 꽤 기이하면서도 역설적인 구석이 있다. 첫 번째, 너무나도 ‘긴’ ‘순간’을 ‘영원’으로 포착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초상화의 의뢰인과 화가의 권력 관계가 시선의 방향을 통해 역전된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이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피사체는 화가의 시선에 구속되어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일 수 없다. 풍경화, 혹은 정물화의 그것처럼 의뢰인은 대상-물(物)이 되어서 천편일률적인 포즈를 유지한 채 화가의 손에서 자신이 그대로 재현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자신이 그렇게 물화(物化)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오르페우스의 신화는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봄’으로써 ‘아내’를 잃는 내용으로 회자되지만, 혹시 ‘에우리디케’도 오르페우스의 눈을 바라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에게 돌아보라고 말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단지 캔버스 위에 영혼 없는 자국처럼 눌어붙어 있는 초상화의 모델을 거부한 엘로이즈였기에 그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에우리디케가 ‘뒤돌아봐’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고.


이 신화의 알레고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그림 속에서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이야기 속에서도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작품 자체는 모든 인물을 ‘존중한다.’ 그것이 카메라의 시선이 그들 시선의 높이를 따르는 이유이다. 더 나아가 이것이 어떤 감독이 연출한 영화가 아니라, 모든 배우들과 제작진이 함께 만들어 내고 있는 영화임을 전면에 표방하고 나선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장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결국 인물과 풍경, 스토리를 ‘담아내는’ 영상의 영역을 넘어서고자 하는 전복적인 시도 그 자체다. 훌륭한 영상미와 연기와 연출, 그러나 적은 대사량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대상을 향하는 일방적이고 노골적인 시선을 버리고, 끊임없이 상대방이 응답할 때를 기다리며 응시(應時)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이건 비단 ‘눈(眼)’의 차원만을 꼬집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고정된 이미지로서, 머릿속의 캔버스 위에 멋대로 칠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기억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망각의 문제이기도 하고, 상대에 대한 얕은 이해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잘 알지 못할 때 그린 그림과, 그들이 사랑으로 ‘타오르기’ 시작한 이후의 그림은 비록 더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훨씬 더 엘로이즈 다운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더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내고 싶어하는 욕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방을 ‘알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삶에 스며드는, 혹은 맑은 물에 잉크를 떨어뜨리는 것과 비슷한 일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네가 보는 것을 나도 보려고 노력해 보고, 내가 보는 것을 네가 보려고 노력해 보는 것은 지난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교감과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결국 물리적으로 동일한 선상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고개를 들어줄 수도, 고개를 숙여줄 수도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 모든 연출력을 동원하여 그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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