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우리의 나아갈 길들이 확실치 않아서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중에서

**박찬욱 감독의 2002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영제는 A Sympathy for Mr. Vengeance다. 복수자에 대한 연민. 여기서 복수라는 것을 Mr. Vengeance라 표현한 이유는 복수자들, 즉 동진과 류 모두 극의 중후반에 이르러 그야말로 복수만을 위해 달리는 복수의 화신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도대체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게 된다. 그저 복수자만 존재할 뿐이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복수의 연쇄를 냉담한 카메라를 통해 마냥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 하드보일드라는 연출방식은 누군가를 향한 응원이나 감정이입은 존재하기 어렵게 한다. 거기다가 이 영화는 말도 별로 없다. 최소한의 대사, 장면과 등장인물들의 행위로만 서사를 이끌어 나간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그들이 오로지 복수만을 향해 미친듯이 달겨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있다. 더불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마주하는 범죄현장에서 정확하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르고 만다. 그들 모두가 1.피해자이자 2.가해자이기 때문이다.


점입가경으로 흘러가는 사건들을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이 비극을 맞게 된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형사가 동진에게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 했을 때 진작에 빠져나왔더라면, 동준이 영미를 고문하고 죽이지 않았더라면, 유선이가 어이없이 물에 빠져 죽음을 맞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 장애인이 차에서 자고 있던 유선이를 괴롭히지 않았더라면, 누나가 죽지 않았더라면, 유괴를 하지 않았더라면, 팽기사가 일인시위를 했던 사람이 류를 자른 공장 사장이 아니었더라면, 공장에서 잘리지 않았더라면, 누나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수많은 가정을 세워보게 된다. 그렇지만 영화 속의 상황들만을 두고 보자면 도무지 그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기 어렵다. 강해지는 복수의 강도와 높아지는 표현의 수위는 그 의문을 중심으로 두고 끊임없이 그 덩어리의 크기를 키우며 관객에게 굴러와 좀처럼 피할 수 없는 충격과 불편함을 안겨준다.


그래,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영미가 해왔던 일에 집중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재벌을 해체합시다, 주한미군 철수, 민중의 삶을 유린하는 신자유주의를 박살냅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떠한 시간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 대한민국에서 IMF가 발발하고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슬로건으로 내걸며 각종 경제정책을 실시했던 시기다. 정부는 긴축재정을 골자로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해 자유로운 구조조정을 허했고, 철저히 대마불사를 유지하며 다수의 중소기업들을 정리했으며 수많은 실업자를 양산했다. 동진의 기업은 이러한 정책 아래서 어려워졌고 종내에는 이혼까지 당했다. 자신만 바라보고 자신이 애지중지했던 딸과 둘이서 생활했다. 반면 류는 사장으로부터 정리해고를 당한 입장이다. 누나가 병으로 오늘내일 하는 상황에서 청천벽력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누나에게 신장을 이식해 주려면 필요한 돈이 한두 푼이 아니다. 거기다가 자신은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치명적인 신체적 결함을 갖고 있다. 맞는 신장을 찾아주려다가 장기매매업자들에게 사기까지 당한 마당에 실직이라니. 안 그래도 힘든데 자꾸만 더 나쁜 일이 생기고 있다. 이 상황은 류와 영미에게 ‘좋은 유괴’라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영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자금의 이동은 화폐의 가치를 존나게 극대화하는 길이구, 그거 좆도 죄 아니야.” 지극히 경제적 관점에서 명백한 유죄가 무죄가 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마련된 무대는 복수에 의한, 복수를 위한 죽음으로 쌓아 올려진다. 류와 동진이 서로 쫓고 쫓기는 상황에서 그들뿐만 아니라 관객들 또한 마주하게 되는 것들은 복수만큼 잔혹하고 냉정한 사회의 단면들이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피자 위에 독약을 소스삼아 뿌려 자살을 선택한 일가족들,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동진으로부터 돈을 받고 그의 복수를 방관하는, 아픈 딸을 둔 형사. 그때의 사회는 차가운 경제적 논리로 인간을 사로잡고 도무지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게다가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어디에 하소연하는 것도 없이 스스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누군가는 말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으며 누군가는 들어줄 수 있는 귀와 입이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러니 여기서 어떤 개인에게 죄가 있고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여기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가장 먼저 1.피해자가 되어 있었으며, 2.가해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다. 극 내내 최반장은 절대로 살해나 유괴란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그저 ‘거시기’라고 애매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범죄와 달리 이 영화에서 일어난 모든 유혈사태들은 그렇게 정의내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자들은 복수자의 위치에 서기 위해 분투했다. 복수를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동진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류를 죽이지 못한다. 류의 누나의 시체를 발견하고 해부하는 장면을 하품하며 바라보고 자장면을 먹으면서 영미를 전기고문했으며 자살한 일가족 틈에서 구해냈던 한 아이가 결국에는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하고 냉정하게 쳐냈던 그임에도 말이다. 그가 류를 만났을 때 흘렸던 눈물이 의미하는 바를 분노라 해야 할지, 연민이라 해야 할지, 혹은 마침내 자신이 목표로 했던 복수자의 위치에 섰을 때 느끼는 허무함이라 해야 할지. 어쩌면 그나 자신이나 복수 그 자체가 되게끔 이끌었던 일련의 상황에 대한 원망일 수도 있을 테다. 동진은 자신의 복수를 합리화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지막 순간에 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착한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할 수 있지?” 나의 너를 향한 복수를 이해해 달라니. 그의 이해를 통해서 어쩌면 동진은 또 다시 유죄를 무죄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네가 유괴를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동진은 류가 어릴 적에 누나와 많은 시간을 보냈던 호수에서 그의 아킬레스건을 끊고 잔인하게 토막냈다. 그러나 여기서 그 역시 영미가 말했을 때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던 그 무정부 혁명조직에 의해 무참하게 난도질당한다. 반전이라면 반전인 셈이지만, 이 영화의 서사를 여태 끌고 왔던 필연적인 복수의 고리는 동진 또한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결국에는 당도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적 반전’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결코 어떤 것도 합리화할 수 없는 비극적인 복수극, 더불어 이 극의 무대를 마련한 그때의 사회에 대한 염세적이고 우울한 시선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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