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영화를 고를 때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n선'이나 영화(혹은 교육방송) 채널에서 방영해 주는 명작극장의 라인업을 한 번씩 쭉 훑어 본다. (상투적으로 말해서)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것들, 여러 시상식에서 그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들이 대부분일 테고, 개중에는 당대에 주목받지 못했던 불후의 명작들이 끼어들기도 한다. 그런 것들이 되려 선정하는 자의 안목을 증명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그 안에서 고른 영화들은, 몇몇 완주하는 과정이 다소 벅차기는 해도, 대개 후회를 남기진 않는데, 그것은 영화가 흥미롭기도 하지만 이모저모 곱씹을 거리를 남겨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얼마전에 본 영화는 소위 말하는 힐링물로 유명한 <바그다드 카페>(1987)였다. 라스베이거스에 못 미쳐 헛헛한 사막에 위치한 카페 겸 모텔 겸 주유소에서 벌어지는 일들 속, 마법 같이 피어나는 두 여성의 우정을 그렸다. 카페 주인 브렌다와 독일인 여행자 야스민은 각각 제멋대로이고 무능력한 남편에게 시달리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그들로부터 '벗어나게' 되는데, 바그다드 카페에서 조우한 그들은 함께 부대끼며 갈등을 겪기도 하고 위안을 얻기도 하면서 점차 스스로의 삶을 찾아간다.
2016년 디렉터스 컷으로 재상영되기도 했던 이 영화가 다시금 조명받은 일에 페미니즘 리부트의 영향이 없었다고 하기는 어렵겠다. 결말에 조금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제로 이 영화는, 아직도 여전히 드물고 당시에는 더 드물었을 여성서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의 축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버디무비의 형태를 때고 있음에 기존 상식의 전복, 혹은 뒤틀림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호평과 함께 끊임없이 명작 대열에서 회자되는 이 작품은 확실히 여러 모로 특별하다. 보고 나서는 말 그대로 힐링도 됐는데, 그러나 왜인지 모르게 찝찝함이 남고 마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을 때 불현듯 떠오른 또 다른 작품은 롤랑 조페 감독의 <미션>(1986)이었다. 얼마 전에 타계한 엔니오 모리꼬네의 ost로 유명하기도 한 이 영화는, 18세기 포르투갈에 복속되어 존멸의 상황에 처한 원주민 과라니족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선교사와 살인 복역수의 이야기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이 무엇이었길래? 하니, 이 두 작품 모두 일종의 '백인(이) (유색인종을) 구원(하는) 서사'를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그다드 카페에 머무는 것은 유색인종이 대부분이다. 공간은 두텁게 쌓인 먼지와 살림으로 난장판인 데다가 사람들은 답답하고 무기력하기만 하다. 야스민은 그들의 삶에 가랑비처럼 스민다. 그녀는 루디 콕스의 그림을 감상할 줄도 아는 사람이고, 필리파의 개성을 이해하는 사람이며, 살로모의 피아노 연주를 인정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야스민을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며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브렌다도 결국 마음을 열게 되고, 야스민은 여기에 마법까지 부리며 죽어 있던 바그다드 카페를 사람 냄새가 가득한 곳으로 만들었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고 공허했던 공간과 사람들이 야스민을 통해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그저 과대해석인 걸까.
고민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발견'한 것. 그래, 좋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87년의 작품이다. 그때는 그런 서사가 낯설지 않았고, 흔했고, 심지어는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이트 테일러의 <헬프>(2011)를 보자. 여기서도 흑인 여성 가정부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정체성을 찾게끔 중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은 백인 여성이다. 나는 아직도 이런 진부한 도식이? 라는 생각이 들어 이 영화의 별점을 깎았다.
그러나 이렇게 깎고 나면, 혹은 별점을 올리고 나면, 가볍지 않은 혼란이 밀려온다. 내가 별점을 매겼던 영화들의 목록을 슬쩍 보면 도무지 대중이 없어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난 후 빠짐없이 어플에 별점을 기록하는 편인데, 문득 '그렇다면 나의 평가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영화를 (감히) 분석하는 분명한 잣대가 없다거나 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이제는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졌음 이리라. 그러니까, 서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어디 어느 지점에 무게를 두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그다드 카페>를 보면서 나는 페미니즘도, 인종문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1993) 역시 주체적인 여성상을 그리고 있지만 뒤에서 병풍처럼 서 있는 원주민들에게 나의 시선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를 보면서는 무자비하게 유린당하는 여성들을 보았다.
명작이라고 꼽히는 것들, 물론 그 영화들은 영화사에서 혁신을 일으켰던 작품들이겠지만, 후대에 그것을 감상하는 나로서는 불편하고 거슬리는 장면이나 설정들이 너무나도 많다. 분명 영화를 '잘' 보는 사람들은 명작에 높은 별점을 주고 높은 평가를 했을 테니, 소위 '영잘알'이라 자부할 수 있으려면 나도 당연히 그들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명백한 기준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작이랍시고 '꼭 봐야 할 영화'라면서 줄을 세워놓는 실태도 불만스럽기 그지없어지는 것이다.
그런고로 나는 도태되지 않은 것들과 도태되어야 할 것들 사이에서 진자운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또한 내가 줏대가 없어서, 다른 누군가들은 나만큼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만 수다한 물줄기들이 하나의 세상으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나의 혼란스러움들은, 물 아래 가라앉아 있는 사석(沙錫) 같은 것이지 않을까, 하고 조금 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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