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서사의 ‘시점(視點)’은 대부분 서사의 목적을 담고 있다. 특정 인물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법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는 사람의 관점이나 가치관을 잘 반영하고 있다든가, 혹은 그 스스로가 변화->성장(어떤 방향으로든)의 길에서 겪었던 과정에 대해 제대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 인물이 ‘작가(作家)’의 전달자로 특정되지 않은 전지적 작가시점의 경우는? 이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은, 그 난립하는 인물들 사이의 충돌, 관계 자체가 작가가 이야기하는 바를 말하는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라서다. 이야기 속의 모든 상황은 결국 작가의 생각 속에서 잉태되고, 혹자가 말하듯이 전개가 되면 될수록 작중 인물들이 스스로 뛰어 노는 상황이 도래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의 손끝을 통해서 자란다는 것이다. 비약해 보자면 이는 결국 작가 자신이 담겨 있지 않은 이야기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도 될 수 있겠다. 글을 접하고 쓰는 과정에서 다소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실수는 시점을 선택하는 시점(時點)에 발생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중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영화 작품들이 몇 개 있는데, 그것들의 특징은, 소위 말하는 주인공이 전개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윤성현 감독의 2010년작 <파수꾼>과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2013년작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를 꼽을 수 있겠다. <파수꾼>의 주인공은, 사실 4명의 남성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개중에서도 기태가 조금 더 핵심적인 역할일 것이다. 좀처럼 원인과 계기를 알 수 없는 기태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그의 아버지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퍼즐을 맞추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이 영화의 큰 얼개라고 할 수 있다.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 역시 학교의 이케맨(イケメン) 키리시마가 갑작스럽게 배구부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주변인물들이 소란을 겪는 순간들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일종의 작가의 대리자로서 역할하지 않고 견인하지 않는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가?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영화의 두 주인공들은 선두에 서 있지 않을 뿐이지, 여전히 서사의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즉 주인공을 핵심에 두고 주변인들이 변죽을 울리면서, 그들은 마치 원심력과 구심력처럼 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명의 손에 들려 있는 주인공의 파편들은 최종적으로 맞춰지길 기다리고 있다. 즉 이와 같은 작품들은 일종의 트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시점을 짊어지고 있는 인물들을 분산시켜놓는다, 혹은 곳곳에 심어놓고 흩뿌려놓음으로써 종국에는 ‘그들’의 변화나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마침내 특정 한 인물의 성장이 아닌 ‘타인들’의 성장을 말하게 될 수밖에 없다.
생각이 이르고 보니, 어느 지점에서는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엘리펀트>(2003)가 떠오른다. 1994년에 미국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사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 영화에는 커다란 사건만 있지 중심이랄 게 딱히 없다. 그것은 연출과 편집 방식에서 드러난다. 작중 인물들이 모두 비극의 시발을 향해 달려가거나, 사건의 ‘일부’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것.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를 드러내려는 것도 아니고, 앞선 다른 영화들처럼 진보하는 무언가를 말해주는 것도 아니거니와 사건 자체의 비극성을 부각하려는 시도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동일한 시간, 동일한 공간 속에 있었던 인물들이 동일한 비극을 맞게 되는 ‘각각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시점은 부서지고, 중심은 해체되었으며, 특정인의 사연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방법을 통해서 한 사건을 둘러싸고 있던 삶의 면면들을 목도한다. 충격파는 한 곳으로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그 주위에 있던 삶들은 단순히 ‘등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점적으로 설명되지 않았음에도 제각기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영화는 채를 거르는 작업과 같은 ‘시점에 기반한 배제’가 아니라, 둘러보지 않으면 놓쳐버렸을 ‘누군가’와 ‘주변’의 서사를 ‘포함’하고 ‘껴안음’으로써, ‘보는 사람의 변화’를 이끌어내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런 시점 혹은 배제와 관련해서 ‘논문’이라는 글쓰기 형식을 두고 꽤 많은 고민을 했던 참이었다. 내 논문으로 ‘사람’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물리적/능력의 한계로 청년에 한정해서 말해야 하고, 그래서 ‘청년’을 이야기하냐 하면 그중에서도 저임금 불안정노동에 종사하는 청년들을 말해야 한다. 물론 그런 ‘부분’을 이야기함으로써 더 큰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별로 반박할 말은 없다. 아무튼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 글을 쓰려고 하는 과정에서 연구참여자들을 ‘선정’하고 거칠게 말해 솎아내는 현실을 보고 겪어내고 있노라면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연구물을 조탁하는 일련의 도정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민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고, 꾸준히 안고 가야 하는 일종의 죄책감 내지 무력감이라고 한다면, 또한 다른 자리에서 그 ‘선택’을 합리화하는 일도 분명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의 많은 연구들 역시 이와 같은 고민들을 거친 후에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연구자들 또한 중심에서 시선을 돌려 주변 이곳저곳으로 걸음을 옮겨가면서 차마 말하지 못했던 자들, 그래서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았던 자들을 비로소 서사의 표면에 끌어올릴 수 있었으리라.
치기와 패기가 버무려졌던 고민은 이렇게 한 번 더 돌파구를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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