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창립의 계기 중 하나였던 2018년 문화연구캠프에서, 당시 조직위원들이 함께 썼던 <3세대 문화연구?>라는 제목의 기조발제문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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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테이블 기조발제문 – 3세대 문화연구?
16회 문화연구캠프 조직위원 (김선기, 옥미애, 이준형, 임동현, 채웅준)
1. 왜 ‘3세대 문화연구’를 묻는가?
세대론은 매우 ‘정치적인’ 담론 형식입니다. 세대 개념에는 언제나 시간성이 함축되어 있는데, 집단적으로 특정한 시간을 주목하도록 유도하고 요청하는 문화정치가 세대론을 통해 이루어지는 까닭입니다. 저희가 문화연구캠프의 대주제를 ‘3세대 문화연구?’라고 정하며 세대론을 사용하는 것 역시 정치적인 이유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세대론의 목적은 1세대와 2세대, 3세대 문화연구를 분리하고 그들 각각에게 각자 분할된 시간을 할당함으로써, 특정한 세대에게 고유한 시간을 바탕으로 한 정체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세대들을 분리하고 그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특정한 세대 주체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특정 세대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목적 역시 아닙니다. 저희는 세대론을 통해 미래, 문화연구의 미래라는 시간을 기준에 놓은 후 함께 논의를 시작하기를 제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세대 문화연구자’에 대한 학문 세대 논의가 특별히 진행되지도 않은 시점에, 아직 현실적인 근거 값이 거의 없는 ‘3세대’라는 기호를 굳이 사용한 이유입니다. ‘3세대’ 그리고 ‘문화연구’라는 두 단어는 일견 명확한 객관적 의미가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 매우 불분명하고 모호합니다. 가능한 한 많은 동료가 이 모호한 단어들의 조합에 대해 궁금해하고, 또 상호주관적인 정의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길 바랐습니다.
문화연구의 미래를 주목할 것을 요청하는 이유는 간결합니다. 문화연구가 여러 차원에서 재생산의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문화연구캠프의 기획과 실무를 급히 맡게 된 이후, 조직위원들은 이 문제를 여러 번 여러 가지 방식으로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자율적인’ 방식으로 이어져 왔다던 문화연구캠프가 올해 열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며칠 뒤 엉겁결에 행사 준비를 맡게 되었습니다. 급한 일정이었기도 했지만 행사 준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는데요. 일단 예년에 비해 접수된 발표문의 숫자가 너무 적었습니다. (미디어)문화연구 전공 대학원생들은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서울권 몇몇 대학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더 다양한 지역과 배경의 문화연구자들을 찾아보고자 했지만, 2-3주 남짓한 준비 기간에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문화연구캠프 자체가 더는 필요하지 않다거나 할 사람이 없으면 없어지도록 두는 게 낫다는 담론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접하기도 했습니다. 실무적으로는 토론자를 비롯해 문화연구캠프에 참석할 선배 연구자, 동료 연구자 선생님들을 모시는 작업도 쉽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은, 아니 박사과정인 우리부터도 문화연구캠프에 왜 참석하는 것일까요? 지적인 관심이든, 동료 연구자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든, 이러한 ‘끌림’보다는 일종의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이 행사를 그나마 지금까지 지탱해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조금 들었습니다. 어쩌면 문화연구캠프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이 행사를 준비하겠다고 덜컥 나선 우리들조차 무언가 활력을 잃어가고 있는 듯한 문화연구캠프, 그리고 문화연구 자체에 대해서 큰 기대는 없으면서도, 이것이 일종의 ‘지푸라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자문도 해 보게 됐고요.
길지 않은 글을 통해 저희는 ‘3세대 문화연구’라는 당장은 정의할 수 없는 미래의 무언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현재 문화연구가 마주한 재생산의 위기를 상호연관된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논의하려고 합니다. 문화연구와 문화연구자, 그리고 문화연구의 장, 다시 말해 문화연구의 내용과 주체, 네트워크가 모두 재생산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어, 각각의 위기가 발생하게 된 맥락과 그 해소, 나아가서는 재도약을 위한 작은 생각들을 풀어내 봄으로써, ‘3세대 문화연구’의 방향을 ‘집단적으로’ 설정하기 위한 논의의 장을 열어보고자 합니다. 이때 저희들의 중심적인 논지 중의 하나는 ‘3세대 문화연구’의 지속과 새로운 도약을 위해 이 기획을 위한 제도적인 설계를 문화연구자들이 집단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문화연구에서 이전에 제기되었던 위기론이 주로 문화연구의 내용적인 탈정치성, 탈급진성을 문제삼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현재 ‘문화연구의 위기’는 문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자 하는 우리들 자신이 문화연구자로서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존을 위해 이곳 학계에서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현실 그 자체라는 점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2. ‘3세대 문화연구’의 내용: 미디어문화연구와 학제적 문화연구
우리는 스스로를 문화연구자로 인식하면서도 때로 문화연구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두고 난감함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난점은 문화연구가 스스로를 비규정적으로 상상해왔기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문화연구의 규정불가능성은 문화연구가 자신의 이론적/방법론적 급진성을 설정하기 위해 구체적인 실천 전략으로 채택해 온 학제성(學際性, Inter- disciplinarity)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학제성이라는 문화연구의 실천 목표에는 선재하는 분과적 틀 속에 자신의 작업을 한정하지 않고, 연구에 있어서 더 다양하고 폭넓은 관점을 수용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저희는 ‘학제성’이라는 실천 전략이 동시대 한국의 문화연구에서 여전히 중요한 내기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3세대 문화연구’에 학제성은 어떠한 방식으로 통합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이른바 ‘미디어문화연구’는 한국 문화연구 수용의 한 가지 맥락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미디어문화연구라는 세부전공의 형성을 이해하기 위해, 문화연구가 한국에서 어떻게 제도화되어왔는지를 간단하게나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에 문화연구를 소개한 소위 ‘1세대’ 문화연구자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 제도적으로 가장 빠르게 자리를 잡은 그룹은 언론학(커뮤니케이션학)이라는 기존 분과학문 제도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언론학 내의 비판커뮤니케이션 전통에서 출발했거나, 영미권의 커뮤니케이션 학제에서 문화연구를 전공했으며,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언론학 내에 문화연구를 정당화된 하위분과로 제도화시키는 성과를 내는데 역할하였습니다. 언론학이라는 분과학문적 틀로의 편입은 ‘불분명함’ 내지는 ‘모호함’을 정체성으로 가지는 문화연구가 비교적 안정적인 물적 토대를 확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점을 취하면서 (미디어)문화연구는 언론학에 학제적 분위기를 형성하여 언론학의 경계를 확장하는 데 공헌하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요? 언론학 분과 소속의 문화연구자들이 스스로를 (문화연구자보다는) 언론학자라고 소개하는 일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신문 매체가 문화연구자들의 주 활동 근거지는 아니지만) 현재 ‘교수’나 ‘언론학자’가 아니라 ‘문화연구자’라는 이름으로 기고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80년대 출생의 국문학과 출신 연구자들이 대부분입니다. 한국적 맥락의 독특한 조어라고 할 수 있는 미디어문화연구는 문화연구의 폭넓은 총체적 연구범위를 텍스트(재현)와 수용자의 측면으로 과도하게 좁히고 있다는 비판을, 태동기에서부터 받기도 했습니다. 언급한 두 가지 현상은, 미디어문화연구라는 제도적 기획에 언론학을 다변화시키는 학제적인 방향의 원심력뿐만 아니라 언론학이 문화연구를 일정하게 변형시키는 분과적인 방향의 구심력이 동시에 작용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저희는 언론학계 문화연구가 자신을 미디어문화연구로 특징지어온 것이 오늘날 몇몇 난점을 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언론학과의 관계 속에서 문화연구 학술 장의 자율성에 위협이 초래될 수 있습니다. 문화연구자들은 자신의 연구가 문화연구의 관점에서 적합한 연구인지뿐만 아니라 언론학의 기준을 만족하는 연구인지를 함께 고려해야 하는 이중의 압박에 놓이게 됩니다. 언론학 내 학술지나 학회에 글을 투고 및 발표하는 경우 일반적인 주류 언론학(사회과학)의 규준을 준수해야 한다는 분과적 압력을 마주하게 됩니다. 더불어 언론학 내에서 상대적으로 실용적인 다른 하위분과들과의 경쟁에서 소수의 위치에 선 결과, 많은 대학에서 언론학 분과 내의 문화연구 전공자가 감소하는 추세에 있으며, 그마저도 1세대, 1.5세대 문화연구자들이 은퇴 연령에 이르렀을 때 그들의 자리를 채울 후속 문화연구자가 언론학 분과의 교수로 선발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상황입니다. 둘째, 언론학 외의 다른 분과적 배경에서 진행되고 있는 문화연구와의 접점이 상실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문화연구캠프에도 주로 언론학 배경의 (미디어)문화연구자들만 참석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 분과의 문화연구자들이 한데 모이는 문화연구만의 독립된 학회는 충분하게 조직화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문화연구 그 자체가 학계 내에서 그리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하게 된 상황과도 연결됩니다. 셋째, 미디어문화연구라는 이름은 언론학 관련 학제에 속해있는 연구자들 개인의 다양한 연구실천을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문화연구에 적합한 성향의 학생들의 학문적 흥미를 반감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언론학 관련 학제에서 문화연구를 공부하는 대학원생-문화연구자들 다수가 스스로의 연구실천을 특정 분과학문의 이름에 한정시키는 것을 어려워하거나 거부하는 일종의 이단적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특정 분과학문의 이름’에는 사회학, 언론학, 정치학, 여성학, 정치철학, 영화학뿐만이 아니라 미디어문화연구도 해당됩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언론학자가 아닌 문화연구자로 소개하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앞서 80년대생의 몇몇 국문학자들이 문화연구자라는 자기정체성을 활용하는 까닭도 비슷한 이유일 것입니다.)
문화연구는 학제적인 학문 기획일까요? 학제성이 문화연구의 이론적인 급진성을 보증해주는 근거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저희 생각에 이것은 절반만 진실입니다. 학제성은 문화연구가 문화연구이기만 하면 만족되는 근본적이고 본래적인 특징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일정하게 조건화되는 요소이며 그러하기에 지속적으로 맥락과 국면에 따라 새로운 실천 전략을 조직해나가야 하는 과정적인 기획이기 때문입니다. 일견 미디어문화연구는 여전히 학제적입니다. 언론학 학제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언론학 분과의 연구결과물이 아닌 사회학, 철학, 여성학, 인류학 등의 연구결과들을 지속적으로 참조해 절합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문화연구가 추구해야 할 학제성이 단순히 기존 분과적 틀로부터의 탈피나 복수의 분과적 지식의 더하기만을 의미한다면, 당대에는 전통적인 분과들 내에서도 분과적 틀에 얽매이지 않는 연구를 다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시대에 사회학이나 문학, 철학 등에서조차 애초의 분과적 압박에서 벗어나 그것을 변형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눈에 띕니다. 경영학과 공학 등 ‘실용 학문’이 ‘융합과 통섭’으로서의 학제성 실천의 선두주자 위치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앞서 미디어문화연구라는 기획이 문화연구의 학제성에 어떠한 난점을 야기했는지를 살펴본 바와 같이, 언론학이라는 학제의 구심력에 대항하는 충분한 크기의 원심력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미디어문화연구는 더 이상 기존의 언론학, 기존의 사회과학을 변형시키는 급진적인 힘을 가진 학문 기획이 아니라, 지난 시절의 짧은 영광을 무력하게 추억할 수밖에 없는 쇠퇴 중인 하위분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학 내 하위분과화는 다른 분과 문화연구와의 단절, 그리고 질적인 또 수적인 재생산의 문제와 모두 얽혀있습니다. 이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로 수렴되는데, 현재의 제도적 조건이 학제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문화연구의 학제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적 조건들을 새로이 창안하기 위한 실천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문화연구가 일정한 물적 토대와 가시성을 획득하기 위해 ‘언론학’에 기대왔던 방식을 넘어서는, 학제성을 그 중심에 두는 새로운 실천을 모색할 때라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문화연구가 그동안 고수해왔던 학제성이 기존 학술 장의 틀을 비틀기 위한 비판의 도구라면, 문화연구는 현재 자신이 놓인 국면 역시도 급진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화연구의 내용으로서 학제성과 그 제도적 조건에 대한 성찰은, 문화연구가 어떻게 재생산될 수 있으며 활발한 학술적 교류를 이끌어내고 비판적 흐름을 창안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에까지 가닿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문화연구의 정체성을 제도적 조건 속에 고정된 채로 두는 것이 아니라, 문화연구의 정체성을 변형하고 다시 쓰기 위한 전략들이 필요합니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저희가 미디어문화연구 기획을 비판하는 이유는 미디어문화연구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기획이 언론학이라는 분과학문 체제로 환원됨으로써 학제성이라고 하는 문화연구의 잠재력을 상실시키는 부정적 효과와 연결될 수 있다는 지점을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이전의 논의에서 나왔던 텍스트-수용자 중심의 미디어문화연구가 탈급진적이라거나 탈정치적이라는 식의 비판과는 일정하게 결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언론학 분과 내에서의 문화연구자 재생산이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미디어문화연구 진영에서도 학제적 문화연구를 실천하는 전략이 상당 부분 유용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다양한 분과학문 체제, 이를테면 문학, 사회학, 인류학, 문화콘텐츠학, 영상학, 예술학 등에 흩어져 있는 ‘비판적 문화연구자’들을 규합하는 대안적인 결합의 힘을 키우는 이중 제도화의 전략이 언론학이라는 분과학문에만 기대는 전략에 비해 효과적일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3. ‘3세대 문화연구’의 주체: 교육과 재생산의 책임, 그리고 문화연구의 매력
80년대 말, 영미권의 문화연구 이론서들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후, 한국의 문화연구는 독학으로 혹은 영미권 대학에서 유학했던 전공자들이 제도권 학계 내에 자리 잡으면서 제도화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세대 문화연구자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소비문화, 대중문화가 본격화되었던 90년대를 배경으로, 이전에 비판적 사회과학의 문제영역에 포섭되지 않았던 대중의 욕망, 취향, 소비 등의 다양한 주제들을 연구 영역에 적극적으로 끌어 들여왔고, 기존의 학문적 풍토와 다른 연구실천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학문장 내에서의 입지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다수의 대학에서 문화연구 관련 강의가 개설되고 관련 학과나 세부 전공이 대학원 내에 자리 잡으면서, 정규교육 체계 내에서 문화연구자들이 성장할 수 있는 제도적 ‘생산 기반’이 어느 정도 마련되었다는 자기 진단이 문화연구 내에서 제출된 바 있습니다.
굳이 ‘생산 기반’이라고 강조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학술제도 내에서 문화연구의 학문적 성과물들이 생산, 축적되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에도 ‘문화연구와 문화연구자의 재생산’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 혹은 활성화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확언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문제의식은 ‘문화연구 학문장’ 내외부의 환경변화와 그에 대한 (학문후속세대라고 할 수 있는) 우리들의 인식과 상황에 대한 감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희들의 위기의식을 가장 자극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문화연구 학제로 유입되는 신진연구자들(학부 졸업생+α)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둘째, 학계 내 신진연구자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매우 약화되었거나 붕괴되었습니다.
이러한 위기들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 제시하고자 하는 '원인'들이 먼저인지, 아니면 현재의 위기가 먼저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원인과 위기가 연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점차 나선형으로 상대항의 크기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위기' 자체에서 확대 재생산의 고리를 끊을 방법을 강구할 수 없음을 알고, '지금 우리들'인 문화연구 진영에 '원인'들이 귀속됨을 인정할 때, '원인'을 지적하는 것은 위기의 고리를 끊을 유일한 대응책일 것입니다.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우선 학교 안의 문제입니다. 석사과정으로 진학을 희망해야할 학부 학생들에게 문화연구가 잘 알려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학부 저학년부터 취업 전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학부생들의 ‘사정’을 핑계 삼기엔 지금의 학부생들의 정치적 의식이나 실천 능력은 그 어느 때 못지않아 보입니다(촛불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화여대 학생들의 학내 투쟁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의식과 역량이 학문적인 진로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근본적으로 그러한 진로가 가까이(학교 안, 선생님)에 있음이 알려지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문화연구’ 자체를 표방하며 학부생들의 학문적 열정을 자극하는 강의들은 적어지고 있고, 대학원생들과 학부생들이 독서 토론회 등을 통해 간헐적이나마 만나던 기회들도 사라지고 있습니다(적어도 캠프 준비위 구성원들의 학교 사정은 그러했습니다). 가장 효과적으로 학부생과 문화연구를 만나게 할 수 있는 학교 내부의 기회들이 적어짐에 따라 학부생들에게 문화연구의 ‘매력’을 알리기가 어려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 실질적인 난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일례로 ‘취업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라는 이유로 문화연구 관련 과목들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개설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지방의 학교들은 이러한 경향이 더 강하다고 합니다). 학교 안에서 문화연구와 학부생을 만나고 계신 선생님들(교수, 강사, 대학원생)과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해보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학교 바깥의 문제입니다. 문화연구가 사회적 현실 안에서 얼마나 유의미한 담론들을 생산해내고 있는가(혹은 담론적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입니다. 이는 우선 학계 바깥의 대중, 예비 연구자들에게 문화연구의 존재와 그것의 사회적 효용성을 알리는 일입니다. 학계 내부자들에게는 학계의 존재 가치와 '학문하기'의 역능을 확인시켜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근래엔 문화연구의 이름으로 제출되어 한국사회에 반향을 일으킨 논의들이 많지 않아보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학이 주도하고 있는 세대론 논의, 여성학이 주도하고 있는 페미니즘 논쟁들에 비해 '문화연구'의 논의들은 크게 사회적 관심을 얻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담론 생산에 실패하고 있는 문화연구는 (적어도 학계 바깥에서는) 존재감을 상실하는 듯하고, 스스로 문제틀을 설정할 동력 또한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현실 반영적이고 실천적인 학문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문화연구가 현실의 어떤 지점들로 더 효과적으로 침투하고 가시화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학교 내부의 문제와 외부의 문제는 결국 문화연구의 주체, 즉 문화연구자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방안을 집단적으로 고민하고 제도를 조직해내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과거 영국 CCCS의 사례를 들어보자면, 당시 자료는 CCCS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비판적인 에토스를 갖게 된 직접적 원인은 문화연구와의 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미 비판적인 학생들이 문화연구를 하러 CCCS에 왔으며, 이는 문화연구 그 자체가 이미 많은 학생들에게 매력적으로 여겨졌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이와는 다릅니다. 사회에 대한 운동적인 야심을 가진 학생들조차 다수가 문화연구 내지는 비판적 학문에 뜻을 품기보다는 LEET에 응시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문화연구의 매력 부재를 그저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매력을 개발하고 알리기 위해, 문화연구자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인상적인 연구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육과 재생산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인식하고, 문화연구자를 길러낼 수 있는 제도적인 기반을 다듬어나가는 것에 대한 고민 역시 진지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에는 학부생들에게 문화연구라는 학문 기획을 가시화할 수 있는 방안과 석박사과정 학생들이 과정 중에서 문화연구의 사회적 효용을 체감하고 그러한 전망을 그려볼 수 있게 하는 방안이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재생산의 실패는 곧 쇠퇴나 소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CCCS가 쇠퇴한 원인과 관련해 대처리즘과 대학제도 개편이라는 국면 이외에도 교육 문제에 대한 안일한 대처를 꼽는 논의도 있습니다.)
4. ‘3세대 문화연구’의 네트워크: 다시 대안/대항적 학술공동체
새로운 주체들이 유입되지 않음으로써 학교 안팎에서 이루어지던 학술적 행위/행사들은 점차 동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각 학교 대학원 단위로 이루어지던 콜로키엄이나 세미나, 스터디 모임들과 학계 차원에서 행해지던 겨울 대학원생 컨퍼런스(언론학), 문화연구캠프(문화연구) 등이 폐지되었거나 위기 국면에 놓여있습니다. 오늘의 캠프도 실은 무산 직전에 놓여있었던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행사들은 학문 공동체 안의 연구자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협업의 기회를 마련하며, 긍정적인 경쟁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실효적 의례이기에 소중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진연구자들이 유입되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각각의 역할(청자, 발표자, 토론자, 사회자, 행사 준비위 등)에 배치되고 그 배치가 갱신되는 순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학계의 의례가 재생산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의례의 중단은 곧 공동체의 중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례들의 중단, 네트워크의 붕괴로 인해 문화연구를 공부하는 신진연구자들이 학교 안팎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스스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은 어떤 행동 강령이나 고전의 문구들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동료 연구자들, 특히 가까운 또래의 연구자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서로의 존재를 기준으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는 데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생활 이후의 연구자로서의 진로 탐색과 미래에 대한 전망들 또한 위와 같이 형성된 정체성을 토대로 가능할 것입니다. 신진연구자들의 유입도 학계가 스스로가 구성해내는 연구자적 정체성의 전시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정체성을 얻은 연구자들에 의해 다시 네트워크가 활력을 얻고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네트워크가 붕괴되어 신진연구자들은 각각의 학교 혹은 연구실에 고립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한 고립은 네트워크의 더 처절한 붕괴로 이어지는 듯 합니다.
이처럼 문화연구자들의 네트워크는 비활성화 내지는 부재라는 위기의 국면에 놓여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1세대 내지는 1.5세대 문화연구자들 사이에 공식적, 비공식적인 네트워크가 촘촘하게 만들어져 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봤을 때 분명 문화연구 학술공동체의 일정한 변화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문사회과학 전반이 그러하지만 (미디어)문화연구 분야에서도 학술대회 및 학술행사에서 신진연구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옵니다. 지난 겨울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열렸던 문화연구포럼G의 관련 토론회에서도 박사학위를 받고 졸업한 선배들을 학계에서 쉽게 만나기 어렵다는 사실에 대한 의아함 내지는 아쉬움이 표출되었습니다. (미디어)문화연구 학술행사에 참석해보면 제도권 학계에 안착한 교수와 교육제도 내에 위치한 전공 대학원생들이 대다수이고, 학위를 마친 신진학자들의 활동이 굉장히 희소한 편으로 인지됩니다. 교수나 강사 외에 학술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부실한 탓에 각자도생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화연구캠프를 준비하면서 더 알게 된 것인데 박사학위를 받은지 상대적으로 오래되지 않은 젊은 연구자들의 일상적인 네트워킹이 상대적으로 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네트워크의 장으로서의 문화연구캠프에도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배 연구자들의 과거 문화연구캠프에 대한 재현을 들어보면, 과거 문캠은 분명 여러 학교의 교수님들과 신진연구자, 석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이 함께 모여 세션장의 열기를 뒤풀이 자리까지 가져가 (상대적으로 지위의 영향을 덜 받으며) 치열하게 치고받기도 하는 네트워크에 가까운 모습이었던 것처럼 그려집니다. 반면 몇 년 남짓의 경험을 통해 보면 현재의 문캠은 대학원생들의 페이퍼 발표회 정도로 축소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러한 네트워크의 위기 혹은 관례화 문제는 학계를 처음 경험하는 대학원생들에게는 약간 당혹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 원인이 무엇인지 한 번쯤 짚어봄 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학술 네트워크 위기의 기저에는 양화된 평가지표를 중심으로 한 국가적/전지구적 경쟁 체제와 관리 권력의 확장 국면에 학계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것은 문화연구자들만의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든 네트워크의 위기는 문화연구자들조차 주류 제도에 맞서는 대항 체계를 구축하는 일에는 성공하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학술 제도의 변화 속에서 신진연구자들은 앞세대의 문화연구자들에 비해 제도적 지위와 그에 따른 경제적 안정성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입니다. 더 많은 논문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에도 시달리며, 이는 연구자들에게서 시간적 여유를 앗아가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컨대 문화연구캠프와 같은 학술행사의 실무를 맡아 준비한다는 것은 여러 단계의 각오를 필요로 하는 일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술 제도의 변화는 문화연구캠프와 같은 네트워크 자리를 ‘질적’으로도 재생산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양화된 학술 제도에서 중요한 것은 학술대회 발표의 횟수, 학술지 논문 게재 횟수이지 그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학술논문이라는 최종 결과물을 목표로 한 기회의 생산과 분배를 제외한 나머지 교류의 기회들이 적어도 저희들의 시선에서는 부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화연구캠프조차 석박사과정생들이 자신의 연구나 문제의식을 발표하고 나눌 수 있는 진입장벽이 낮은 행사에서, 졸업 요건으로서의 발표 횟수나 BK 등의 제도를 위한 혹은 개인적인 실적을 채울 수 있는 형식적인 행사로 일부 변모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런 자리에서는 세션이 끝날 때마다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도 합니다.
문화연구에서도 학술 네트워크는 실적 위주의 형식적인 자리로 굳어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렇기에 상호 인정과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인 교류가 기존의 학술 제도에서 계속되어 온 전통적 학술행사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실질적인 네트워크의 기반이 없다면, 학술행사는 단순히 발표 실적이거나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노동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대감이 없다 보니 점점 더 네트워크는 쇠퇴하고, ‘각자도생의 학술공동체’라는 어딘가 모순적인 상황이 강화되어 가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상황일수록 오히려 대안적이고 대항적인 학술공동체를 상상하고, 꾸리기 위한 실천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수, 신진연구자, 대학원생이라는 각자의 위치에서 혹은 그런 위치 간의 거리감을 무화하면서) 진정 서로의 연구에 귀 기울이며 창발적인 논의들을 만들어내고 ‘학문하는 벗’이라는 유대가 움트는 자리, 각자의 궤도만을 성실하게 돌고 있는 문화연구의 여러 행성들이 충돌하고 또 그럼으로써 연대감을 만들 수 있는 자리들을 상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저희는 전환점이 되어줄 몇몇 계기들을 상상해봤고 이 자리를 통해 조심스레 제안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문화연구캠프와 같은 학술교류의 자리가 단순히 연구의 결과물들이 유통되는 자리가 아니라, 좀 더 창발적인 논의가 생성되는 공간이 되길 희망합니다. 다양한 주제어들로 토론 모임들이 구성되고 이들의 토론 결과가 다음 문화연구캠프로 이어지면서 일련의 연구 시리즈물을 함께 구축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문화연구캠프에서 신진연구자 선생님들의 박사학위논문이나 단행본을 놓고 충분한 난상토론을 하는 북토크를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희는 이번 문화연구캠프에서부터 다양한 상상력을 펼쳐 보고자 했으나, 사실 준비기간의 부족으로 역부족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션이나 교류의 형식을 다변화함으로써 실질적인 네트워크의 의미를 찾아 나가는 방향으로의 변화가 문화연구캠프에서 꼭 계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문화연구 학제로 유입되는 신참자들이 문화연구 학계의 지형과 학계의 언어, 연구 자원들에 대해 충분히 소개받고 질문해 볼 수 있는 자리들이 많이 만들어지기를 바랍니다. 특히 오늘 발제를 준비하며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이런 교육과 재생산을 위한 자리와 기회가 각 대학원의 여건에 따라 빈도나 내용의 폭에 있어서 편차가 크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예컨대 언론학과 내에서 문화연구 전공 교수님 방에 소속된 대학원생의 경우, 교수님이나 같은 방 선배를 통한 교육 외에 대학 내에서 학술 네트워크를 형성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지역에서 문화연구자로 정체화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전일제 대학원생-문화연구자 동료는 물론이고 지도교수님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경우도 많아 독학 문화연구자가 되어야 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문화연구자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만이라도 개별적으로 이루어지기보다 지역 단위에서 합동으로 혹은 학회에서 기획되고 진행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기획은 문화연구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실제로 문화연구와는 거리가 있는 것을, 문화연구자는 아닌 학생들에게 강의해야 하는 신진연구자들에게도 후배들과의 즐거운 교류의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더불어 문화연구에 대한 학문적/대중적 관심과 지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문화연구의 문제영역들을 소개하는, 새로운 연구 대상이나 이슈들을 함께 고민해 볼 수 있도록 하는, 학부와 대학원이 연계된 교육프로그램 혹은 일반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워크숍 등이 다시금 기획되길 바라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3세대 문화연구’를 계속해서 고민하고자 하는 혹은 문화연구라는 이름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네트워크를 희망하는 연구자들이 함께 만드는 상시적 학술공동체가 만들어지기를 바랍니다. 문화연구캠프의 이야기를 해 보자면, 그렇지 않아도 ‘페이퍼 발표행사’처럼 되어 기대감이 줄어들어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도 1년에 한 번 모였다가 나중을 기약하기만 하는 일의 반복이 조금 많이 아쉽게 느껴집니다. 저희 준비위원들이 2018년 1월에 개최했었고, 또 내년 겨울에 다시 개최하고자 하는 ‘문화연구포럼G’와 같은 대안적인 학술행사를 더 촘촘히 운영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온라인/모바일을 기반으로 조금 더 너른 교류망을 만드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대안적/대항적 학술공동체를 단단히 함으로써, 창발적인 상상력이 만들어지고, 그 상상력이 현실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5. 3세대 문화연구의 새로운 무기
문화연구에는 언제나 ‘위기’ 담론이 존재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굳이 문화연구캠프의 전체 세션이라는 자리를 빌려 문화연구의 위기에 대해서 또 한 번 말을 보태는 것이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면에서 저희는 이전의 위기론과 저희의 ‘3세대 문화연구’에 대한 상상 사이에 변별점이 있다고 주장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위기의 원인과 내용에 관한 진단입니다. 이전의 많은 위기론이 지적했던 것은 (미디어)문화연구의 탈정치성, 탈급진성에 가까웠다면, 저희는 주로 문화연구의 재생산 위기를 언급하였습니다. 더불어 ‘3세대 문화연구?’라는 제목을 통해 서두에 언급했듯이 과거나 현재를 지적하고 반성하는 것보다는 미래에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희가 꺼낸 이야기는 재생산이 위기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학문후속세대에게 무언가를 해 달라는 단순한 요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3세대 문화연구’를 새롭게 써 나가는 공동의 작업에 필요한 공동의 역할을 일정하게 자임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주체가 없다, 즉 재생산이 어렵다고도 생각하지만, 동시에 주체 없이는 자리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함께 하고 있는 공부모임에서 랏자라또의 <부채통치>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런 원고와 라운드테이블 세션을 준비하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몇몇 아포리즘이 있었습니다. 랏자라또는 니체를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는 역사 속으로 함몰되는 자, 또는 역사에 의해 조형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동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들뢰즈를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걱정하거나 희망할 필요는 없고, 새로운 무기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기념품 볼펜에 ‘제16회 문화연구캠프’라는 클래식한 문구 대신, ‘3세대 문화연구를 위한 새로운 무기’라는 좀 어색하지만 궁금하기도 한 문구를 넣어보게 된 이유입니다. 문화연구캠프에 와 주셔서, 또 ‘3세대 문화연구’를 집단적으로 기획하자는 이야기를 함께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의 짧은 상상은 출발점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몇몇 참석하지 못한 선생님들도 ‘3세대 문화연구’에 대한 생각을 문화연구캠프 메일로 보내주시기도 했는데요. 이렇게 미래를 생각하며 ‘새로운 무기’를 찾으려는 공동의 노력이 중요하지 않나 다시 생각해 봅니다. 무기를 찾기 위한 중단되지 않는 모험, 무기를 사용하기 위한 전략적이고 의식적인 실천이 문화연구에서 지속적으로 갱신되기를 바라 봅니다.